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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선교사 130년 전 발자취 첫 공개임연철 박사, 캠벨 선교사 파송 전 문답서 공개
성령의 감동으로 지원했냐는 질문에 캠벨, “I Do.”

“선교사 지원 결정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뤄진 것인가?(Do you feel that your heart is moved by the Holy Spirit to take upon you the work of a foreign missionary?)”

“그렇다. (I Do.)”

- 캠벨 선교사의 미 남감리회 선교사 지원 문답 중

 

“캠벨 선교사가 죽기 전 날, 병상에서 한국인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캠벨 선교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오, 저는 한국인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는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며, 그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One of the later days, I think only the day before her death, she had been talking to the Korean nurse and was looking at her so earnestly when she said "O, I love the Koreans so much I would do anything possible for them, if need be, I would die for them.)”

-에스더 L. 쉴즈 간호사의 캠벨 선교사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 중

 

지난 3일 본지를 방문한 임연철 박사가 캠벨 선교사의 한국 파송 전 선교 자료를 공개했다. 임 박사는 1887년 중국 선교 후 1896년 안식년을 지낸 캠벨 선교사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과 문답서 등을 본지에 단독 공개했다.

배화학당을 설립하고 순교를 각오하며 한국을 사랑한 조세핀 E. P. 캠벨 선교사(Josephine E. P. Campbell, 1853~1920)가 1887년 만 33세 때 작성한 선교 파송 지원 문답서와 1897년 한국 파송 직전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를 입고 미국 LA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미국으로 캠벨 선교사의 죽음을 전하는 부음 등이 지난 3일 공개됐다.

이번 자료를 본지에 단독 공개한 임연철 박사는 “오는 12일 캠벨 선교사 서거 100주기를 앞두고 새로 공개된 이번 자료는 캠벨 선교사의 면모를 되새길 수 있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전기 작가 임 박사가 공개한 이번 자료는 미국 뉴저지 드루대학교 감리회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있던 것을 지난 10월 말 입수한 것으로, 조선에 파송된 감리회 최초 여선교사 캠벨 선교사가 130여 년 전 한국 복음화를 위해 어떤 각오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캠벨 선교사가 1886년 자필로 작성해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자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 제출한 ‘선교사 지원 문답 서(Questions to Candidates)’에서 그는 “선교사 지원 결정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뤄진 것”이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답했고 “선교를 평행동안 할 의향이 있느냐(Is it your intention to make this your life-work?)”는 질문에는 “완전한 결심을 했다(It is my full determinention.)”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지원 동기와 교회 이력 등 10개 질문을 통해 캠벨 선교사가 한국으로 파송되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엿볼 수 있다.

임연철 박사는 “자필 답서를 통해 요절했지만 LA트리니티남감리교회 알론조 캠벨 목사(A. W. Campbell)와 결혼해(1878년) 목회 경험이 있던 캠벨 선교사는 ‘교회 관련 업무를 해본 적 있냐’는 물음에 ‘지난 15년 동안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교회 안팎에서 일했다. 내 자신을 선한 일을 하는 도구로 생각한다’고 답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답변서를 통해 캠벨 선교사는 사범학교를 졸업은 못했지만 3년 반의 교사 경험이 있고, 성악과 악기를 배웠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선교 본부가 마지막 질문으로 나이를 묻는데 캠벨 선교사가 자신을 ‘33년 9개월’이라고 답했다”며 “기록한 나이를 통해 답변서 작성시기가 1887년 1월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캠벨 선교사는 같은 해 4월 중국에 파송됐다. 따라서 문답서는 중국 선교사 파송 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자선교부가 선교사를 지원하는 후보자들에게 묻는 질의서. 임연철 박사 제공.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자선교부의 질의에 캠벨 선교사가 자필로 작성한 답변서. 임연철 박사 제공.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캠벨 선교사의 초상 사진. 임연철 박사 제공.

특히 임연철 박사는 캠벨 선교사의 가장 젊은 모습으로 추정되는 초상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첫 공개된 초상 사진은 가로 6cm, 세로 9cm 크기로 캠벨 선교사가 미국 LA에서 찍은 것이다. 임 박사는 “하단에 ‘미시즈 J. P. 캠벨, 코리아(Mrs. J. P. Campbell, Korea)’라고 기록돼 있다. 사진 속 캠벨 선교사는 깃이 목까지 올라오는 중국식 복장(치파오)을 하고 단정하게 머리를 손질한 우아한 40대 여성의 모습”이라며 “중국식 복장과 사진 하단의 ‘코리아’라는 기록으로 미뤄보면 44세 때 선교지를 한국으로 변경하면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 한국에서 함께 사역했던 캠벨 선교사의 동료들이 미국으로 그의 부음을 알리며 고인의 업적을 추모하는 편지도 공개했다.

임 박사는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한 간호사 에스더 L. 쉴즈(Esther L. Shields, 1868-1941)는 1920년 9월 1일부터 11월 12일 오후 캠벨 선교사가 임종할 때까지 함께 있었다면서 스타이츠, 허스트 등 여러 의사와 로스, 리드, 하디 박사 등도 임종을 함께했다고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쉴즈 간호사는 캠벨 선교사가 죽은 그날 아침 마지막으로 읽은 성경 구절은 ‘시편 45~46편’(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이라고 부음을 통해 밝혔다.

특히 쉴즈 간호사는 부음에 “캠벨 선교사가 죽기 전 날, 병상에서 한국인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캠벨 선교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오, 저는 한국인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는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며, 그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적어 캠벨 선교사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캠벨 선교사가 죽기 전 날, 병상에서 한국인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캠벨 선교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오, 저는 한국인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는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며, 그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100년 전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 에스더 L. 쉴즈가 미국에 보낸 캠벨 선교사 부음 편지 중. 임연철 박사 제공.


이외에도 임연철 박사는 캠벨 선교사가 미국 택사스주 와코(Waco)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Bryant L. Peel)는 변호사, 외할아버지(Martin Ruter)는 택사스 지역에서 미 연방 전 선교사로 활동했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감리회 전도사였음을 알리는 내용 등 3~4쪽 분량의 네 종류의 일대기도 공개했다. 또한 캠벨 선교사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선교지에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장하는 ‘사범학교장 보증서’, 33세 나이에 선교사로 지망한 캠벨 선교사가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해달라며 남감리회 선교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자필 편지도 공개했다.

미국 남감리교 프린스 부인이 쓴 '한국에 심은 복음-조세핀 필 캠벨의 이야기' 표지. 뉴욕 미국 감리교 본부 도서관 소장이었으나 현재는 감리교문서보관소에 있다. 임연철 박사 제공.

임연철 박사는 최근 충청 선교의 개척자이자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전기 '이야기 사애리시'와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의 학당장을 지네트 월터 선교사 전기 '지네트 월터 이야기'를 펴냈다.

캠벨 선교사는 1897년 10월 9일 미국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파송으로 한국 여성선교 개척자로 서울에 왔다. 배화학당을 설립하고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전신인 자골교회를 세웠다. 1918년 8월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귀국해 휴양 중 1919년 3.1운동으로 배화학당 학생들이 옥고를 치르고 있다는 소식에 그해 7월 한국으로 귀환했다. 당시 건강 악화로 인한 주변의 만류에도 캠벨 선교사는 “조선을 위해 일할 것이고 조선에 돌아가 묻히겠다”며 한국행을 강행했다. 1920년 11월 12일 향년 68세로 한국에서 순직 후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안장됐다.

김목화 기자  yesmoka@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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