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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목사 순교 50주년에 만나 본 맏손자 신성균 장로
자의식 부족한 감리회 “속상하다”

1950년 10월 10일은 신석구목사가 순교한 날이다. 따라서 올해는 항일 민족지도자이자 감리교 목사인 신석구목사의 순교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해 신석구목사 순교50주년예배를 드렸다. 그때 신석구목사의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신석구연구(이덕주 저)”도 감리회 홍보출판국에서 발간하였다. 신석구목사의 순교 50주년을 맞아 신목사의 맏손자인 신성균장로(대구제일교회)를 만나보았다.
신석구목사 순교 50주년인 10월 10일을 앞두고 구(舊) 대구시청 앞에 있는 그의 법무사 사무실에서 만난 신장로는 상당히 격해 있었다. 그는 기자와 만날 약속을 하고 미리 준비해둔 자료를 꺼내어 보이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최근 역사학자들의 역사이해에 대해서 성토했다.


신장로가 꺼내보인 자료는 지난 8월 4일자 동아일보 14면에는 신모교수(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의 ‘한국사 바로보기’라는 타이틀의 기획기사가 있었다. 3.1운동을 주제로 다룬 이 기사의 머리 제목은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의 거사’ 아니다”고 되어 있었다.
동아일보가 지면 한 면을 다 채운 이 역사기획에서 신교수가 주장의 주요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3월 1일 오후 2시 약속대로 젊은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였으나 민족 대표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각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 시간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음식상이 나오고 주산월을 비롯한 기생들이 시중을 들었다.”
이 주장은 당시 명월관 기생 이난향의 ‘회고록’(중앙일보 1971년 1월 15일자 ‘남기고싶은 이야기: 명월관 편)을 자료로 해서 썼다고 신교수는 밝히고 있다.
“연행된 민족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와 경무총감부, 그리고 경성지방법원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손병희, 정춘수, 홍병기는 지조를 굽혔고, 한용운은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3.1운동의 주역으로 볼 수 없으며 3.1운동을 민중 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역사의 조타수(操舵手)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 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3.1운동에 대한 신교수 주장의 요지이다.

문제가된 신문의 지면

실제로 기사본문 상단에는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들이
기생들의 접대를 받고 있는 삽화가 있었다. 이 신문
기사의 내용과 삽화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인 신석구 목사의 맏손자 신성균 장로를 화나게 만들었다.
신장로는 즉각 반박문을 보내 이 기사에 대해서 항의했다.
(위 자료는 신장로가 제공하였다.)

이 신문을 읽은 신장로는 A4용지 6장 분량의 반박문을 동아일보에 보냈다.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 ‘3.1운동’을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이 반박문에서 “신교수의 기사에는 해방직후 북한당국의 3.1운동의 역사관과 무엇인가 일맥상통하는 점이 엿보인다는 점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과 민중은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신복룡교수의 논리는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을 거세하려는 부당한 논리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는 기독교측 대표인 목사·장로가 16명이나 되는데 그 엄숙한 자리에 감히 기생이 합석할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어느 기록 자료에도 없는 사실을 일개 기생의 회고담을 진실인양 기술함은 학자적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대표들의 인격과 신성한 독립선언서 선포식을 폄훼해도 정도가 지나치다. 이는 3.1운동에 대한 모독이요, 우리나라 헌법전문에 있는 3.1정신을 부정하고 3.1운동에 근간을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국기를 흠집내는 행위라고 단정한다.”며 신교수의 글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사실 역사학도가 아닌 입장에서 신교수의 주장이나 그 주장에 대한 신장로의 반박에 대해서 쉽게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반박문에서 역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충분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신성균장로는 올해 일흔다섯살이다. 그 나이면은 사실 나이라고 하기에 민망하다. 그래서 연세(年歲)라고 하지 않은가. 인생 일흔다섯이면 세상사 어지간한 일을 가지고는 마음 흔들리지 않을 만큼 생의 무게가 쌓였을 것이고 그래서 그 어떤 타협도 추하지 않을 그런 연륜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니었다. 신교수의 글을 두고 그가 낸 장문의 반박문을 보면 그는 아직 기개가 펄펄 살아 넘치는 열혈청년이었다.
그는 또 감리교회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수년 전에 교단월간지에 실린 글을 복사하여 기자 앞에 내어 놓았다. 그 글은 중부연회 모 목사가 쓴 “감리교회 창립기념일을 지키자”는 제목의 제언이었다. 신장로가 문제로 지적하는 부분은 “감리교회가 1930년 12월 3일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총회를 열고 양주삼목사를 총리사로 선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같은 날 한국에 들어와서 장로교(통합측)은 1912년에 창립되었다고 하는데 감리교회는 어째서 장로교회보다 훨씬 뒤늦은 1930년에야 교단이 창립되었다고 하는가. 이것이 그의 불만이다. 우리가 장로교회보다 뭐가 뒤 떨어지는 것이 있다고 감리교회의 역사를 그렇게 인식하는 것인가 하고 그는 반문한다.

대구지역은 장로교회가 대부분이다. 대구의 교회 가운데 감리교회의 숫적인 점유율은 한줌밖에 지나지 않는다. 없으면 꿔서라도 우리를 빛내고 싶은 것이 인지 상정인데 스스로 장로교회보다 모자라게 표현하고 있는 감리교회의 창립역사에 대한 이해는 겸양지심이 아니다. 그것은 병신짓거리라고 말하는 그가 얼마만큼 속이 상한지를 읽을 수 있다.
평생을 감리교회를 섬겨온 그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장로교회 장로들이다. 이 친구들이 감리교회가 장로교회와 한날 한시에 들어오긴 했으나 뭔가 부실해서 감리교회가 장로교회보다 덜 성장했다고 알고 있는 그들의 감리교회 이해가 속상하다.
이것뿐만 아니다. 순교자에 대하여 감리교회적으로 체계적인 연구도 장로교회에 비해서 일천하다고 신장로는 보고 있다. 이처럼 자의식이 부족한 감리교회가 위대한 감리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역사적 자의식의 문제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남재영 부장 veritas@gamly.com



맏손자의 결혼


이덕주저 ‘신석구 연구’의 본문 중에서

공산주의 정권 수립과 지배 체제에 대해 더 이상 저항이나 방해가 용납되지 않는 북한 상황에서 ‘월남을 거부하고’ 남아 있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이념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는 신석구 목사 앞에는 탄압과 박해만 남아 있었다.
위기와 불안의 1948년에 신석구 목사는 가정적으로 작은 위로를 받을 일이 있었다. 그것은 맏손자 성균이 결혼하게 된 것이다. 손이 귀한 집안이어서 하나 남은 아들 태화는 손이 끊긴 형님(석규)댁으로 ‘출계하여 대를 잇게 하였고 그는 맏손자로 하여금 자신을 대를 잇도록 할 생각이었다. 개성에서 태어난 둘째 손자(영균)는 진남포상공학교에 재학중이었는데 그는 족보상 형의 손자로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형님 댁까지 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대를 이을 맏손자가 결혼하였다.
결혼은 조화철목사 중매로 이루어졌는데 신부 조명숙은 평양 유성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조윤승 목사의 맏딸로 평양 정의여고를 나와 감리회 계통의 광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조윤승 목사는 본래 장로회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했으나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해방 전에는 두로도교회에서 시무하였고 해방 후 평양 유성리교회로 옮겨 시무하고 있었다. 그는 서부연회 재건 때부터 부서기로 활동하면서 신석구 목사와 자주 접촉하였는데 그 관계가 사돈지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래 결혼예정일은 5월 10일로 잡았는데 그날이 마침 남한에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일이었어요. 북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소요가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날짜를 5월 20일로 연기했지요. 결혼식은 장인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평양 유성리교회에서 송정근 목사님 주례로 거행되었다. 그날 진남포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평양으로 올라갔는데 평양에 다 와서 버스가 고장이 나서 모두 늦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트럭을 타고 늦게서야 식장에 도착했어요. 평양에 들어가면서 검문을 받았는데 함께 가신 현병찬 목사님께서 군인들을 설득해 통과한 기억이 납니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정작 신석구 목사는 그날 맏손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가족 일보다 더 시급했던 ‘교회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정보 당국에서 시국 관계를 빌미로 그의 ‘평양행’을 금지시켰는지도 모른다. 비록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맏손자의 결혼은 그에게 오랫만에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이어졌다. 교회 일을 핑계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은 그렇다치고라도 고향의 조상 묘도 찾아보지 못하여 아들 노릇도 제대로 못한 자신에 대한 괴로움이었다.

관리자  li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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